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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VOL.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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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내 인생의 자동차구렁이가 똬리를 풀던 날

얼마 전, 사업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귀농을 선택한 한 친구의 이삿짐을 날라다 준 적이 있다. 사업 실패는 친구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고, 설상가상으로 아내마저 집을 나가 버려 친구뿐만 아니라 두 아이들까지도 곤경을 겪고 있었다. 결국 고심 끝에 친구가 내린 결론은 귀농이었다.

01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일가친척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시골 마을이었다. 급하게 얻은 빈집 마당에 짐을 풀어놓고 우리는 서둘러 방 정리를 했다. 방 안에 있던 온갖 쓰레기들과 거미줄을 걷어내고 보니 두 개의 방이 제법 넓어 보였다. 아랫목에 깔린 장판이 부스럼딱지처럼 그을려 있었지만 검게 탄 장판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훈훈해졌다. 사람의 손때가 묻은 흔적이 가난해진 친구의 마음에 불씨를 피워주기를 바랬다.

친구가 부엌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천장이나 창틈에서 비라도 샐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천장 군데군데 쥐 오줌 얼룩이 나 있었지만 비가 샐 정도는 아니었다. 방문이나 창문도 따로 손을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양호한 편이었다. 조그만 쪽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햇빛, 햇빛들…… 그렇게 밝고 따듯한 햇빛을 나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쪽창 밖으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펼쳐진 시골 마을의 낮고 낮은 지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안 되는 가재도구들을 집 안으로 끌어 들이고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원래 과묵하기도 하지만 지금 친구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짐작이 가던 터라 나는 분위기도 바꿀 겸 조금은 과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야, 집 좋은데…… 명당이다, 명당. 금세 부농 되겠다.”

부엌에서 선반을 손보던 친구가 마당을 향해 얼굴을 내밀었다. 모자 속으로 푹 꺼진 친구의 눈빛이 웃음을 찾으려면 아직은 좀 더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하리라. 억지로라도 친구의 말문을 열어주고 싶었다. 평소와는 다른 나의 과한 제스처에 친구는 정말, 억지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방 정리 대충 됐으면 아이들 좀 데려와라.”

꼭 필요한 만큼의 말을 끝내고 친구의 손은 다시 부산해졌다. 이사할 집의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아이들을 읍내 PC방에 내려주고 왔었다. 친구는 아이들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 애들은 내가 가서 데려올 테니 방이나 좀 닦아. 청소만 하면 궁궐이다, 궁궐!”
“그리고 올 때 뭣 좀 먹어야 하니까 먹을 것도 좀 사오고……”

지갑을 꺼내는 친구의 손을 만류하고 나는 서둘러 집을 나와 차를 몰았다. 할부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승합차였지만 이 차가 내게로 온 후 가장 뜻 깊은 여행일 것이었다. 비록 화려한 동행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의 발이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차에게는 호강일 것이었다. 엔진 소리가 한결 부드러웠다.

읍내까진 차로 약 십여 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도보로 걷기에는 다소 먼 거리, 이 길로 아이들이 통학을 해야 한다. 버스도 없고 친구는 자동차도 처분해버렸다. 아이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동차와 함께 살다가 자동차를 떠나보낸 뒤의 불편함을 겪어본 이라면 지금의 이 거리가 천리보다 멀게 느껴질 터. 하물며 아이들이 느낄 불편함은 오죽 하겠는가.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오래된 속담이 현대문명의 최첨단 자동차에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아이들을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 시골 정육점이 눈에 띄었다. 잘린 소머리와 우족들 그리고 시뻘건 조명으로 연출된 살벌한 실내 분위기가 아이들을 자극할까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너스레를 떨며 아이들을 유도했다.

“얘들아, 이따 저녁에 장작불 피워놓고 삼겹살 구워먹을까, 어때?
“와, 맛있겠다. 그치, 형!”
“…….”

정근이의 두 살 또래 형인 정민이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제 아비를 닮아 말도 별로 없는 아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아이, 나는 자꾸 정민이의 눈치가 보였다. 몇 가지의 찬거리와 상추, 깻잎 그리고 삼겹살을 손에 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읍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아이들에게 새로 살게 될 동네 분위기를 알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집 정리도 거의 끝나 도배와 장판만 깔면 나름대로 훌륭한 집이었다. 마당도 제법 넓어 텃밭을 일궈도 될 정도였다. 다행히 아이들은 저희들이 살 집보다는 집 주변의 풍경들에 더 호기심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정민이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보였다.

02

아궁이 속에는 타다 만 재와 습기와 적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무꼬챙이로 재를 파내는데 꼬챙이 끝에서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똬리를 튼 채 죽은 구렁이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나는 얼른 구렁이를 신문지에 싸 보이지 않게 둘둘 말아 마당 한 구석에 묻어주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방을 데웠다. 멀리서 누군가 보라고 일부러 연기를 많이 나도록 불을 피웠다.

‘이젠 빈집 아닙니다, 잘 좀 부탁합니다!’

고영
시인, 월간 <시인동네> 발행인 겸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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