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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VOL.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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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 최초로 자가용을 장만한 이는 마목수였다. 공사판으로 떠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깜깜 무소식이었던 마목수는, 차가 생기자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기가 막히지. 버스 세 번 갈아 타야 해수욕장까지 두 시간 반 거리 아닌가. 그런데 그게 말이지, 차로는 40분밖에 안 걸리더라고.”(참고로 길이 비교할 수 없이 좋아지고 자동차성능도 좋아진 지금은 시내 교통정체를 감안해도 해수욕장까지 20분이면 갈 수 있다.)

범골에 젖소를 등장시킨 김우유가 우유를 팔아먹으려고, 김천소가 농협돈을 크게 융자받아 트랙터 장만할 때 트랙터까지 싣고 옮기려고, 조채소가 도시에 채소를 판매하려고 트럭을 장만했다. 길이 시멘트로 포장되고 나서는, 트럭을 장만했던 이들이 승용차까지 사면서 1가구 2차량 시대를 열었다.

01

농촌지킴이들 대부분도 1990년경부터 자가용을 마련했다. 차가 없으면 영농후계자라고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던 때이기도 했다. 1992년 기준으로, 추석 때 자식 중 하나라도 승용차를 몰고 와서 집마당에 턱 하니 빛나는 주차를 해놓았던 집이 35호 중 15호였다. 1994년 설날 기준으로, 차 한 대 이상 주차된 집이 34호 중 26호였다.

주차 없는 8호 중에 3호는 차를 가져올 자식 자체가 없는 집이었지만, 나머지 5호는 자식들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자식놈들 중에 차를 가져올 놈이 한 명도 없는 터수이었기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다. 오히려 부모들은 괜찮아 했는데, 그 집 자식들이 우리들은 한 놈도 차가 없어 너무 쪽팔리다며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 물론, 그런 집도 5년 이내에 자식 숫자만큼의 차가 집 앞에 서있게 되었다.

자식 여럿인 늙은이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주차장 건설공사를 벌여야 했다. 마당이 넓다고 소문난 집도 마당을 더 넓혀야 했다. 주차장 만들고 마당 넓히는 김에 아예 집을 새로 지어버리는 집도 속출했다.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더라도, 자식놈들 시집장가 보내고 더러 효도방문이라도 받고 싶다면 고쳐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밥하는 데, 씻는 데 누는 데는 아파트 흉내라도 내야 며느리 구경을 해볼 것이었다. 부엌 수도가와 변소 고치다 보면 결국 다 고치게 된다. 어버이가 신식 집에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그래야 자식이 멀리 떨어져 마음 편히 살 수 있다) 바라는 마음과 함께, 나중에 물려받아 별장처럼 쓰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은 자식들의 지지와 성원도 컸다. 하여 범골은 새집짓기 열풍에 휩싸였다. 너도 나도 농협돈을 끌어다 농촌드라마에서 나오는 집 엇비슷하게 개축을 했다.

김천소는 별명이 수두룩한 사내였는데, 마이카시대로 인해 가지게 된 별명이 하나 더 있었으니, 다름아닌 김견인이었다. 경운기들과 트럭 몇 대가 쓰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던 범골길은 승용차가 무시로 드나들자 교통정체가 끊이질 않고 사고도 수시로 생기는, 문제 많은 길이 되었다.

1987년부터 2015년 10월 30일까지, 범골길에서는 233회의 교통사고(접촉 124회, 추락 109회)가 발생했다.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건 김천소의 쓰다 말다 한 <농사 이야기> 덕분이다. 김천소는 농사에 관한 이야기 말고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잡다하게 적어놓았다. 유난히 ‘차 사고’ 집착하듯 기록했다. 차와 차가, 차와 경운기가, 차와 오토바이가, 차와 자전거가, 차와 사람이 끝없이 부딪쳤다. 그런데도 믿기 어렵지만, 사람이 죽은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접촉사고는 길이 좁아서 그랬다 치고, 추락사고는?

운전경력 10년이 넘는다고 자부하는 토박이 운전자도 돌연 나타난 사람을 피하려다가 논바닥으로 처박히는 판이었으니, 처음 들어오는 운전자는 길을 잘 몰라 커브를 돌다가 수로나 진창에 바퀴가 빠지거나 둑에서 미끄러져 아예 논바닥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길을 좀 안다는 외지의 자식들도 운전면허증 따자마자 성급히 차를 마련해 몰고 왔는지 운전미숙으로 풍덩풍덩 처박혔다. 진창에 빠져 헛바퀴 돌며 흙만 튀기는 차를 어찌 두고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시내에서 견인차 부르면 그 돈이 얼마인가? 김천소가 트랙터를 몰고 가서 차에 밧줄을 걸고 간단히 빼주었다. 그렇게 차 빼주는 사람, 김견인이 되었다.

늙은이들은 자식의 차가 빠지면 돈 들여 견인차 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김천소에게 전화부터 넣었다. 어떤 늙은이는 아침에 해도 될 걸 곤히 자고 있는 새벽에 했다. 그래도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는 덜 성가셨다. 휴대폰이 생기니 동네어른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받기는 했는데, 받자마자 들리는 소리라고는 “자식놈 차좀 빼줘!”였다.

02

도로사정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인 안골과 당골에서도 김천소를 불러댔다. 그이에게 견인신세를 진 적이 있는 안골인과 당골인은 견인 당시 고맙다고 담배 한 갑 인사치레도 못했던 터라(김천소는 비흡연자였다) 김천소가 이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화끈하게 지지표를 주었다. 견인업자들은 불퉁댔다. “백호리는 무보수 견인꾼이 살어. 거기는 가봐야 돈 나올 일이 없어.”

김천소의 트랙터가 빼내지 못한 차가 딱 두 대 있었다. 관정을 파놓은 논이 가끔 있는데, 그 차가 하필이면 그 웅덩이까지 날아가서 빠졌다. 트랙터마저 웅덩이에 딸려 들어갈 판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대는, 1985년부터 아침에 두 번 점심 한 번 저녁에 한 번 백호리를 통과하는 버스였다. 버스를 타려면 멀리까지 하염없이 걸어야 했던 늙은이들은 버스가 다니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하여간 그 버스 중에 하나가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김천소가 나섰지만 트랙터는 버스를 끌어내지 못했다.

2012년, 범골청년회는 시멘트포장 이후 무려 34년 묵은 범골길을 (수로를 덮어버리고) 두 배로 넓혔다. 도로확장 이후 차 사고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2016년 보완공사 이후로는 추락한 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김천소는 견인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김천소는 가끔 견인일지를 들춰보았는데, 범골의 자동차역사나 다름없었다.

김종광
소설가,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산문집 '사람을 공부하고 너를 생각한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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