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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 VOL.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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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동차 역사(上)

태동기 – 망치로 만든 자동차

한국 자동차 역사의 시작은 전쟁의 폐허에서 시작됐다.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들어 자동차를 만들던 한국은 불과 60여 년 만에 세계 5위의 자동차 대국으로 우뚝 섰다.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한국의 자동차 역사를 3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맨주먹과 망치로 시작했다. 한국전쟁 후 폐허에서 미군이 폐차한 차를 불하받아 그 부품을 재생하고, 제대로 된 강판 대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 들었다. 그렇게 만든 최초의 국산차가 시발이다.

1955년 9월에 생산을 시작한 시발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어렵게 틔운 싹이다. 최무성씨 3형제가 설립한 국제 차량 제작 주식회사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미군 지프를 모델로, 드럼통을 펴서 망치로 두드려 차체를 만들었고 변속기와 차축 등 주요 부품은 재생 부품을 사용했다. 그 어려운 와중에서 4기통 엔진의 실린더 헤드 등 부품 일부를 독자 개발할 만큼 자동차에 대한 열정은 뜨거웠다.

01▲ 대한민국 최초의 자동차 시발 자동차

승용차의 시작이 시발이었다면 버스의 시작은 ‘버스 왕’ 하동환 자동차였다. 52년 정비업체로 출발한 하동환 자동차 공장은 55년 12월에 하동환 자동차로 개명하고 버스 생산을 시작한다. 역시 군용 폐차를 불하받아 재생 부품을 만들고, 망치로 편 드럼통 철판으로 버스를 만들었다. 56년 말에는 서울 서대문구에 정식 버스 제작공장을 세웠다. 50년대 말에 이르러 하동환 자동차는 규격화된 버스 제작을 시작한다. 주먹구구식 제작에서 벗어나 규격화된 버스를 만들기 시작한 것.

당시 신진공업도 버스 재생 조립을 하고 있었다. 대한자동차공업협회의 도움으로 58년에 UNKRA 자금 중 20만 달러를 배정받고 현대식 정비공장 건설을 60년 5월 완공하면서 버스 재생 조립사업을 본격 추진하게 된다. 이 공장이 부산에 있는 지금의 대우버스 전신이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주도하에 좀 더 짜임새 있는 자동차 산업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자동차공업 육성정책을 펴게 되면서다.

새나라 자동차가 등장하는 게 이즈음이다. 62년 1월 29일 재일교포인 박노정 씨가 새나라 자동차를 설립했고 ‘자동차 공업 5개년 계획’에 의해 새나라 자동차가 소형자동차 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로 닛산 블루버드를 들여와 조립한 1,200cc 새나라 택시는 빠르게 시발 택시를 대체해 나갔다.

62년 5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이 발효된다. 대중 소형차 공장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외국산 자동차 수입을 67년 12월까지 한시적으로 제한했다. 이 법이 공포되고 새나라 자동차가 부평에 연산 6,000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국내 최초의 자동차 조립공장이다. 일본 닛산으로부터 세미녹다운 방식으로 조립 시판에 나선 새나라는 63년 7월 외환 사정 악화로 부품 수입이 막혀 생산이 중단된다.

새나라가 생산을 중단하자 신진공업은 63년 11월부터 유선형 승용차 ‘신성호’를 제작 판매한다. 신성호는 가격이 비쌌지만 성능은 기대 이하여서 322대를 생산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국산차를 처음 제작했다는 명분을 업고 신진공업은 소형차 조립공장 허가를 얻은 뒤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66년에는 상호를 신진 자동차 공업으로 바꾸고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 기술도입 및 부품 도입 계약을 체결한다. 신진은 66년 5월부터 부품 국산화율 21%로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했다. 그해 8월에는 대형 버스, 67년 5월에는 고급 세단 크라운 생산에 이어 6톤 카고와 덤프트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62년 5월 자동차 공업 보호법이 발효된다. 대중 소형차 공장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외국산 자동차 수입을 67년 12월까지 한시적으로 제한했다. 이 법이 공포되고 새나라 자동차가 부평에 연산 6,000대 규모의 자동차 공장을 세운다. 대량생산 방식을 갖춘 국내 최초의 자동차 조립공장이다. 일본 닛산으로부터 세미녹다운 방식으로 조립 시판에 나선 새나라는 63년 7월 외환 사정 악화로 부품 수입이 막혀 생산이 중단된다.

새나라가 생산을 중단하자 신진공업은 63년 11월부터 유선형 승용차 ‘신성호’를 제작 판매한다. 신성호는 가격이 비쌌지만 성능은 기대 이하여서 322대를 생산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국산차를 처음 제작했다는 명분을 업고 신진공업은 소형차 조립공장 허가를 얻은 뒤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66년에는 상호를 신진 자동차 공업으로 바꾸고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 기술도입 및 부품 도입 계약을 체결한다. 신진은 66년 5월부터 부품 국산화율 21%로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했다. 그해 8월에는 대형 버스, 67년 5월에는 고급 세단 크라운 생산에 이어 6톤 카고와 덤프트럭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

신진은 도요타의 250만 달러 현금 차관 등을 얻어 부평의 50만 평 대지에 연산 1만 5,000대 규모의 공장을 짓고 68년 초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신진 자동차로 단일화됐지만 국산화가 지지부진하자 정부는 65년 아세아 자동차를, 다시 67년에는 현대자동차의 진입을 허용한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신진, 현대, 아세아 3개로 정립되는 시기다.

프랑스 르노와 기술제휴를 모색하다 이탈리아 피아트로 방향을 튼 아세아는 이후 66년 12월 연산 8,000대 규모의 광주공장 건설을 시작한다. 하지만 경영상태가 부실해 자동차 생산을 해보지도 못하고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가 버린다. 아세아는 이후 70년 3월에 피아트 124 생산을 시작한다.

현대자동차는 67년 국산차 역사에 등장한다. 67년 12월 29일 현대모터(주)로 시작한 뒤 곧바로 회사 이름을 현대자동차로 바꿨다. 현대는 영국 포드와 기술 및 조립 계약을 맺었다. 기술 제휴선으로 GM과 포드를 접촉했고, 경영참여를 내세운 GM을 배제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포드와 손을 잡는다.

현대는 68년 2월부터 생산 준비에 나서 그해 11월 코티나를 첫 출고한다. 1.5리터 차체 중량 906kg인 5인승 중형 세단이었다. 69년 1월에는 D-750 트럭도 생산한다. 중형 세단 포드 20M, R-192 버스 등이 그 뒤를 이어 생산된다. 승용차 버스 트럭 등을 모두 생산하는 종합 자동차 제조업체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시작한 기아산업은 1963년에 일본 동양공업과 기술제휴로 K-300, T-600 등 삼륜차를 제작 판매하지만 별 재미를 보지는 못한다. 66년에는 두 번째 3륜 트럭을 시도한다. 일본 도요고교의 기술협력으로 제작한 기아 마스터 T-2000이었다. 이 차는 출시 후 큰 인기를 끌며 T-600 생산으로까지 이어진다. 기아차는 1971년 드디어 네 바퀴를 단 차를 만든다. 사륜 트럭 타이탄과 복사를 내놓은 것.

자동차 제조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생산대수도 크게 늘었다. 66년 3,430대였던 생산대수는 70년에 2만 8,819대에 이른다.

오종훈
오토 다이어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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