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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VOL.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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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에세이
그해, 여행은 공포가 아니라 위로였음을

그해, 여행은 공포가 아니라 위로였음을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공포’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10년 전 그해, 저는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가족들에게 자동차로 전국일주를 떠나자고 제안했어요. 아내와 아들은 공포를 느끼는 대신 자신들의 행운에 겨워 비명을 질렀죠. 저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모한 나의 결정에 대해 은근히 가족들이 말려주길 바랐는지 좀 씁쓸하더군요.

서울을 떠나 처음 도착한 곳은 강화도였어요. 애초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떠난 여행이 아니었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서 남해안을 돌고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온다는 매우 일반적이면서도 무식한 루트를 잡고서도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역사관이었어요. 역시 아내는 저와 달랐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모아둔 상당한 자료를 가방에서 꺼냈거든요. 심지어 당시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여행을 위한 경위서까지 제출한 터여서 준비성이 철저했습니다. 어느 곳에 가던 어김없이 입장료나 관람권을 끊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은근히 부아가 치밀던 차에 아내의 준비성은 그나마 위로가 되었죠.

초지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동막 해안을 지날 때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H 시인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능하면 아는 사람들은 만나지 않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냥 지나쳤어요. 외포항에 도착하고서도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석모도에 가서 1박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였죠. 아내는 마애석불을 봐야 하기 때문에 건너자는 쪽이었고, 차를 가지고 건너는 문제가 복잡할 것 같아서 저는 반대했습니다.

대안을 요구한 아내에게 제가 제시한 곳은 충남 태안에 있는 안면도였어요. 그만 둔 직장의 직원들과 세미나를 간 기억이 있었고, 가족들과도 몇 번 다녀온 경험이 있어서 길도 익숙했습니다. 요즘에는 길을 몰라도 내비게이션이 모두 안내해 주지만 당시 운전자들에게는 잘 아는 길이 목표였고 희망이었죠. 저는 간신히 아내를 설득했고, 어느덧 노을이 깃드는 강화도를 뒤로하고 서해안고속도로를 찾아 출발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걱정이 슬금슬금 일어났습니다. 걱정이 바닥으로 뿌리를 내리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더니 뚜렷하게 기둥이 세워지기 시작했죠. 예상은 했지만 걱정은 한 가지로 귀결되었습니다. 바로 돈이었죠. 돈은 곧 모든 것을 위협하기 마련이죠. 물론 직장을 그만 두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셀 수 없이 떠올렸던 실체였습니다. 그렇다고 걱정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애써 걱정을 버려야 했습니다. 걱정은 내일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게 아니라 오늘의 용기와 의욕을 앗아가는 법이니까요.

01

안면도에 도착하자 어둠이 드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백사장항 인근의 민박집을 찾아들었고, 허기진 배를 채운 후, 잠이 들었죠. 안면도에서는 2박 3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백사장해수욕장에서 방포해수욕장, 꽃지해수욕장 등을 지나, 안면도 자연휴양림을 거쳐, 섬의 끝인 영목항에도 갔습니다. 물론 좀 볼 만한 곳이다 싶으면 주차비와 관람료를 내야 했고, 돈 쓰는 일이 가장 공포였던 저로서는 속이 편할 리 없었죠.

아내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음으로 향한 곳은 전라도 광주였습니다. 저의 이종사촌 누님을 찾았습니다. 서울에 살 때 가까운 아파트에 살면서 아내와 가까워진 누님은 가이드를 자처했을 뿐만 아니라 3박 4일 동안의 숙박집 주인도 마다하지 않았죠. 우리는 무등산 인근을 관람하고, 남도답사 1번지로 유명한 영암, 강진, 해남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아울러 마지막 날에는 마침 모세의 기적처럼 바닷길이 열린다는 진도로 향했죠. 관광객이 얼마나 몰렸는지 자동차를 주차할 곳도 찾기 어려웠으나 경찰이었던 매형의 배려로 위풍당당하게 경찰서 앞마당에 차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km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질 때 바닷길이 드러난 장면은 장관이더군요.

그 사이 지인을 만나지 않겠다는 나의 소심한 원칙은 지인을 찾아가야만 하는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법이죠. 가족여행 중에 느낄 법한 가장의 고뇌라고 해두죠. 찾아간 곳은 J 시인이 사는 진해였습니다. 서울에서 작업실을 함께 쓰면서 가까워졌던 J 시인은 모 사관학교 내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죠. 때문에 그의 아내가 가이드를 맡았는데 2박 3일간의 여행이 지루해지자 인근의 거제도로 떠나자고 제안했습니다. 3박 4일간 머물렀던 거제도에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L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J 시인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오랜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낙향하여 민박집을 마련한 인물이었죠. 그와 낮에는 바다낚시를 다니고, 밤에는 술을 마시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지냈습니다.

02

사람들과 헤어져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자동차까지 싣고 갈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죠. 운전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동안 저에게는 더 이상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부산 시내의 한 모텔에 투숙한 후, 천정을 바라보았을 때 도로에 그려진 점선과 실선이 눈앞에서 버젓이 지나갔습니다. 다음날도 오랜 피로는 풀리지 않았죠. 그 일만 없었다면 마지막 3박 4일은 강원도 쪽에서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부산을 빠져나와 강원도 쪽으로 향하던 저는 교통사고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눈은 뜨고 있었으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도 핸들을 틀지 못하고 가드레일을 향해 곧장 달려가는 내게 아내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저승여행을 할 뻔했던 것이었죠.

저는 그때 휴게소로 차를 몰고 들어가 자동차에서 8시간을 시체처럼 잤습니다. 그리고 저는 잠에서 깨어나 이제 서울로 올라가자고 제안했고, 아내와 아들은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 여행을 통해 저는 분명히 공포를 체험했습니다. 물론 12박 13일의 여행을 끝으로 우리에게는 고향인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더 공포로 다가왔죠. 그러고 보면 저는 낙향한 사람들을 주로 만나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자동차로 섬들만 찾아다녔다는 사실은 더 나중에야 깨달았죠.

1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해의 여행과 공포를 기억합니다. 생각해보니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공포라고 말한 사람은 프랑스의 소설가 카뮈였습니다. 저는 여행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위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을 함께하고 계신 여러분들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평안하시길.

신승철
소설가. 작품집 『태양컴퍼스』, 장편소설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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