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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VOL. 349

2018 / VOL.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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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앞에도 승용차가 주차되다니 꿈만 같았다

밤은 참으로 더디 갔다.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남편을 기다리고는 했다. 창문을 훑고 가는 세찬 바람 소리가 인기척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어둠이 새벽 속으로 침몰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삐삐로 겨우 안부를 전송하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속이 탔겠는가. 진즉 버스나 전철은 끊기고 주머니도 비어서 택시도 타기 힘들었을 터인데 신랑이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는지 몰랐다. 내가 다그치기라도 할까 봐 만취한 얼굴로 쓰러져 잠들기 바쁜 사람이었다. 다음 날 물어보면 “김 사장이 로얄 살롱으로 태워 주더라, 이 실장이 그랜저로 태워 주더라.” 이사니, 실장이니 성 씨별로 직함을 다 내밀고 나면 후배가 튀어 나오고, 선배들이 거론되었다. 몇 시간의 추궁이 계속되자, 그제야 풀 죽은 얼굴로 걸어서 왔다며 발바닥의 굳은살을 보여 주었다.

당시 남편은 서너 평 남짓한 광고 기획실을 운영했다. 직원 없이 혼자 경영하다보니 편집부터 발행, 납품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그 당시 우리는 자가용이나 업무용 차량이 없었다. 택시로, 버스로 전단을 운반하면서 동분서주할 때였다. IMF 시절이라 떼이는 돈도 많았고 김 이사, 이 실장, 한 전무 등을 들먹이며 성씨 별로 사기마저 당했다. 그런 마당이니 매일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급기야 쌍둥이 아들 유치원비도 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친정어머니께 맡기고, 나 또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 발품 파는 일이 많아졌고, 빈 쌀독을 쓸어내며 삶에 이골 난 여자처럼 남편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학습지 선생으로 무거운 책을 들고 이집 저집 전전하던 내게 자동차 한 대를 사 주셨다. 거의 새차에 가까운 초록색 중고차 ‘유로 엑센트’ 였다. 운전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나는 겁이 나서 남편에게 양보했다. 우리집 앞에도 승용차가 주차되다니 꿈만 같았다. 반짝반짝한 자동차를 미끄러지는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꼬집어보기도 했다.

자동차 키를 들고 다니는 습관이 들지 않았던 남편은 아침마다 키를 찾는다고 수선을 떨었다. 자가용 때문에라도 술 취한 모습으로 늦게 귀가하는 날은 없겠지. 내심 기대하며 하루를 멀다하고 반질반질 닦아댔다. 이제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드라이브도 하면서 즐겁게 지내리라. 주말에는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두엄 냄새 가득한 시골을 달려보리라. 아이들과 차 안에서 주전부리하며 놀이동산도 가보리라. 그러나 간절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만취한 남편은 어디다 주차를 해 놓고 오는지 조금도 시간을 당겨오지 않았다.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눈물 나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래, 차에 흠집 내지 말고, 음주 하지 말고, 교통 위반만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둠이 서성이다 돌아갈 때까지 마음을 다져 먹으며 잠이 들고는 했다.

하지만 웬걸… 맥주 한 잔 마시고 버스를 타고 오려는데 길가에 주차해놓은 자가용이 신경이 쓰이더란다. 골목에 제대로 주차하고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운전대를 잡았단다. 골목을 기어오르는 순간, 마주 오는 택시의 백미러를 박았단다. 택시 운전사가 헉, 뭐지? 하고 확 돌아보다가 목이 꺾여서 입원을 하셨단다. 거금 300만원에 합의를 하고 벌금 150만원이 나왔단다. 그리고 맥주 딱 한 잔 마셨는데 면허 취소가 떴단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것도 잠시, 하루를 멀다하고 날아오는 위반 고지서는 또 어찌할 것인가. 속도 위반, 주차 위반, 신호 위반, 한 달에 서 너 번은 딱지 값을 내야 했다. 화가 나서 다그치면 주차비가 너무 아까워서 그랬단다. 잠시 물건만 내리면 되는데 돈을 내기가 억울했단다. 갓길에 살짝 세워둔 것을 5분 사이에 딱지를 끊어버려서 자기도 몹시 속상하단다. 한편으로 이해는 된다. 몇 시간동안 거래처에 머무를 것도 아니고, 물건만 간단히 내리면 되는 일이니, 주차장 찾고, 물건 내리고, 짊어지고 옮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비상등을 켜 놓아도 사정없이 끊어대니 꼭 국가가 깡패 같단다. 자칫 레커차에라도 끌려가는 날에는 자신이 황량한 사막에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처량하단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수액이 그립단다. 그렇다할지라도 언제까지 이런 짓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은가.

01

우편함에 쌓이는 위반 고지서도 무감각해질 무렵, 반짝거리는 애마도 한쪽 옆구리가 찌그러져 볼품이 없어졌다. 사는 것에 지쳐 세금이 밀린 건지, 우리가 세상에 밀려난 건지도 모른 채 겨우 숨구멍만 열어놓고 있었다. 번호판 지키기도 급급한 상황이라 돈만 잡아먹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커가고, 세금은 밀리고, 승용차를 팔자니 일이 안 되고, 몰고 다니자니 경제적 사정이 바닥이었다. 머리끝까지 스트레스가 쌓여 고지서를 펼치지도 않은 채 찢어버리기 일쑤였다. 남편은 폭죽처럼 터지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인지 틈틈이 우편함을 뒤져서 고지서를 말끔히 숨기고 다녔다. 독촉장은 무감각해지고 싶은 나의 욕구를 칼로 헤집고 다녔다. 언젠가는 다 갚고 말아야지.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워야지. 우편함에는 예쁜 편지만 쌓이게 하리라. 다짐, 또 다짐하면서 그렇게 몇 해를 넘겼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뒤가 구리면 자신의 앞길에 시궁창이 펼쳐진 듯 찝찝한 것. 털 것을 털지 못한 겨울나무를 보았는가. 우수와 근심에 짓눌린 낙엽을 몸에 지녀봤자 뼈만 삭는 것. 그래, 털어내자. 가벼워지자.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자. 책임질 건 깨끗이 털고 갱생하자. 단단히 마음먹고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희 위반한 금액이 얼마인지 알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떨리는 심정으로 자동차 번호와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불러 주었다. “동래구청만 ㅇㅇㅇ만원이고요, 해운대 구청 ㅇㅇ만원, 진 구청 ㅇㅇ만원, 강서, 남구, 중구, 동구, 수영, 사하, 연제, 금정 구청,-가까스로 웃음을 참는 듯-심지어 기장군까지 범칙금이 있습니다. 모두 합쳐서 ㅇㅇㅇ만원입니다”

아, 부산 전 구역을 다 휩쓸고 다녔구나. 도대체 월급보다 위반한 금액이 더 많으니 손이 떨리고 눈물만 터져 나왔다. 몇 백만 원이나 되다니! 몇 년 만 더 위반했으면 천만 원에 육박했을 것 같았다. 억장이 무너져 며칠을 앓아누웠다. 울렁거리는 심정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일어나 은행을 향했다. 이래저래 사정하고 당겨서 겨우 완납하고 은행 소파에 기대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가슴 한구석이 돌무덤에 깔린 듯 괴로웠다. 벌금도 벌금이지만 조만간 폐차될 애마를 떠올리니 참담했다. 마치 첫사랑과 이별의 운명 앞에 놓인 애틋한 연인 같았다. 진흙탕이며 비탈길을 함께 굴러온 바퀴, 비걱거리는 창문, 차선을 바꾸어주던 핸들, 하나하나가 커다란 생명체처럼 아른거렸다. 추울 때나 더울 때나 가족을 태우고 어디든 달려주었던 고마운 벗… 노쇠한 몸으로 숨길 고르며 힘든 길 무사히 달려준 아름다운 동반자… 여태 너덜너덜한 딱지만 붙여주어서 그저 미안할 뿐인, 나의 첫사랑…. 아무런 보상도 없이 녹슨 철골들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초록색 승용차가 사라진 적막한 골목을 바라보며 한동안 젖어 지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도 발목이 묶여 씁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모든 것이 녹슬어가는 기분이었다. 시장을 볼 때도, 멀리 나갈 때도 무거운 가방을 들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우리는 삼 년을 더 버티다 결국 승용차 한 대를 다시 장만했다. 은색 옷을 입고 나타난 새로운 가족, 용맹스러운 풍채가 어떤 고행의 길도 잘 지켜줄 것 같았다. 남편 또한 몇 백의 벌금을 물고 정신을 차렸는지 좀처럼 주차위반을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우리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조심히 몰며 덕지덕지 딱지를 붙이거나 몸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 아침마다 평온의 기도를 올리며 함께 무사히 달려가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조원
시인. 부산 작가회의 회원, 시집『슬픈 레미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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