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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VOL.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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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03

STORY03

자동차 에세이
가슴 설레던 ‘첫차’의 추억

무엇이든 첫 번째의 경험은 특별하다. 하물며 그것이 ‘첫차’임에랴. 아버지가 물려준 낡고 빛 바랜 쏘나타이거나 중고차 시장을 뒤져 찾아낸 빨간색 모닝이거나 남자에게 있어 첫차는 첫 여자만큼이나 짜릿한 경험이다. 그 의미 깊은 경험담들.

첫 번째 남자, 울다

나는 내 첫차를 좀 얼떨결에 샀다. 오래 전, 당시 다니던 직장의 부장이 언제부턴가 가끔 야근을 마치고 늦게 퇴근할 때마다 나를 자신의 차로 집에 데려다 주곤 했는데, 일부러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매번 그렇게 했던 이유가 알고 보니 나한테 그 차를 팔기 위해서였다. 그 차는 5년 된 에스페로였는데 그때 이미 주행거리 12만 킬로미터를 기록 중이었고 주행거리를 감안해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난 그 차를 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스타일 하나는 에스페로가 당대의 ‘갑’이었다. 그렇다 해도 소음 심하고, 이미 노화가 시작된 그 차를 내가 왜 덜컥 샀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다섯 번째의 차를 타고 있는 나한테 아직까지 그 차만큼 애틋했던 차는 없었다. 그 차는 나한테 있어 정든 반려견 같았다. 마음 통하는 친구였다고나 할까. 나는 군견병으로 복무했는데 내 책임이던 셰퍼드는 근무할 때나 훈련할 때나 귀신같이 내 기분을 알아차리곤 했다. 짐승도 정이 깊으면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는데, 쇳덩어리에 불과한 자동차와 인간인 내가 마음을 나누게 될 줄은 몰랐다. 차를 인수하고 보니 이건 말이 아니었다. 오일이 새고, 벨트는 너덜거리고, 변속기는 소리를 내고…. 한 마디로 속아 산 거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단 말이 딱 내 경우였다. 그래도 직장상사라 항의 한 마디 못했던 건 내 개인적인 불행이라 할 밖에….

결국 산 값의 절반을 들이고서야 차는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선형으로 쭉 빠진 몸매, 고속도로에서 유연하게 달려주는 안정감, 우아한 와인 색상까지. 안 보이던 장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치고 닦을수록 차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낡은 차였지만 내 기분을 알아주듯 잘 달렸다. 그 차에 가슴을 끓게 하던 한 여자를 태웠고, 한없이 들뜬 기분으로 그녀와 경춘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던 시절이 내 첫차도 가장 잘 달리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1년인가 지났을 무렵, 그녀와의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면서 차도 다시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사랑에 눈먼 날엔 차 고장쯤은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차에서 언성을 높이는 날이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액셀러레이터를 있는 대로 밟아대곤 했다. 그녀와의 관계는 결국 오래지 않아 파국을 맞았고, 얼마 되지 않아 고향집 가는 길에 차는 어두운 도로 한복판에서 우두커니 서버렸다. 내 첫차는 깊은 밤, 차도 다니지 않는 시골 지방도에서 수명을 다한 거였다. 결국 그 차는 수리도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폐차장으로 갔는데, 그때 나는 눈물을 조금 흘렸던 것 같다. 한때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던 한 여자와의 이별에서도 울지 않았는데 이젠 아무런 진동음도 내지 못하는, 곧 고철 덩어리로 바스러지게 될 내 첫차 앞에서 말이다.

두 번째 남자, 흥분하다

솔직히 나는 좀 으스대고 싶어서 차를 샀다. 멋진 차를 사서 오토바이 타는 아이들이 그렇듯 예쁜 여자를 옆자리에 태우고 강변을 신나게 달리고 싶었고, 쿵쾅거리는 음악을 크게 틀고 길거리에서 창문도 내려보고 싶었다. 기왕 으스대려면 덩치도 커야 했고 평범한 세단이 아닌, 폼 나는 차여야 했다. 그런 차가 뭐가 있을까? 나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코란도로 결정했다. 서울에 올라와 직장을 잡고 오피스텔 생활을 하면서 다른 데 저축은 못해도 차 살 돈은 반드시 모으리라 마음먹었다. 특정한 차를 홍보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디자인이나 성능이나 실용성이나 코란도만한 차는 없다고 생각한다. 차에 올라 핸들을 잡으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 그 차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1년이 걸렸다. 돈이 목표 금액에 도달하기 이전부터 나는 중고차 사이트를 꼼꼼히 뒤졌고, 틈만 나면 매매시장을 헤매고 다녔다. 그 결과 사정권에 들어온 차가 없지 않았지만 어쩐지 선뜻 계약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뭔가 운명적인 ‘필’이 탁 꽂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들 중에는 이거다, 하는 것이 없었다. 결국 내 차가 된 것은 친한 선배의 삼촌이 타던 차였다. 차를 보러 가기도 전에 이미 반쯤은 그 차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매결정은 시운전 20분으로 충분했고 인수인계는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아직도 그 소리가 생생하다. 내 차라고 인정된 순간, 처음 시동을 걸고 난 후 들리던 힘찬 구동음. 그날 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 세워둔 ‘내 차’가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너 번도 더 층계를 오르내렸다. 괜히 범퍼도 만져보고, 후드도 열어보고 올라앉아 시트 조절도 해보면서. 그리고 그 다음날 일찍 차를 몰고 나섰는데, 이날 하루는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가슴 졸인 날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 전지현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해도 첫차를 운전하던 그때 이상으로 흥분하진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3년째 타고 있는 그 차는 여전히 처음 느낌 그대로다. 이것이야말로 ‘내 것’이라는 느낌. 차를 갖고서 으스대게 되었냐고? 그야 물론이다.

세 번째 남자, 죄송하다

아버지가 차를 사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먼저 떠오른 건 주책이라는 단어였다. 자식들도 다 컸겠다, 퇴직도 하셔서 슬슬 텃밭에 모종이나 가꾸면서 자식들이 태워주는 차 얻어 타고 편안히 다니시면 될 텐데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무엇 하러 차를 사려 하시는가 싶어서. 평생 복무하시던 지방직 공무원을 퇴임하신 후 아버지가 시작하신 일은 운전면허증을 따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열심이셨다. 그보다 더 뭔가에 몰두하시는 걸 본 일이 없었을 정도였다. 세 번인가 낙방하신 끝에 드디어 면허증을 땄는데, 평소에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으시던 분이 그날은 종일 싱글벙글이셨다. 그 얼굴에 비치던 의기양양한 표정이란! 솔직히 좀 의외였다. 무슨 무공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나중에야 알았다. 아버지는 다만, 아직 일할 나이에 텃밭이나 가꾸는 늙은이가 되기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얼마 있지 않아 차를 사야겠다고 말을 꺼내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짜증이 났던 이유는, 당당하게 당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애써 자식의 동의를 구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라’고 퉁명스레 대답하고 말았는데, 아버지는 벌써 그 이전부터 자동차 판매 대리점을 돌아다니며 카탈로그를 잔뜩 모아 놓으셨다. 메모까지 해가며 고르고 고른 끝에 아버지가 선택하신 차는 은색 엑센트였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차가 오던 날 아버지는 골목까지 나가 맞아들이셨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일과는 차와 관련된 것이 전부가 되다시피 했다. 장보기를 비롯해 집안의 모든 외출 심부름을 자진해 도맡으셨고 가까운 거리에 사는 손님이 다녀가도 꼭 태워다 주시길 자청하셨다. 하루에도 몇 번씩 더럽지도 않은 차를 꼼꼼히 문질러 닦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약간의 쓴웃음도 났는데, 아버지의 그런 행동을 상실감에서 오는 일종의 집착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애지중지 하시던 그 차를 아버지는 채 2년을 타지 못하셨다. 아버지의 유산이 된 그 차를 동생이 물려받아 탔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차에 대한 아버지의 유별난 집착은 온전히 당신 개인 이름으로 소유한 유일한 물건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30년 넘게 일하신 터전을 떠난 이후 밀려온 공허감을 어쩌면 아버지는 그 차 하나로 메우셨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 차는 아버지에게 굉장한 의미가 되어준 첫차였다. 곰곰 생각해 보건대 차는 같더라도 그 의미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아버지께 죄송스럽다. 말로 다 표현하긴 어렵지만.

이경섭
칼럼니스트, 오디너리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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